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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는 고등학생 시절 매일 일기장에 아침 기상 시간, 공부한 내용, 읽은 도서 내용 등을 기록했다. 이한열(1966~1987) 학생운동가 :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짐. 이는 6·10항쟁의 기폭제가 되어 6·29선언을 이끌어냄. 27일 후인 7월 5일 사망. 7월 9일 치른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에 전국에서 160여만 명 참여.
학교 새마을신문에 실린 이한열 열사의 고교생 특별수련기에는 일찍이 개인과 나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한 그의 성숙한 생각이 나타나있다. 학교 새마을신문 "나와 사회와 국가를 이을 수 있는 밧줄을 잡아당겨야 한다"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는 길은 개개인의 의식을 바로잡아.. 튼튼한 겨레의 건물을 짓는 것"
또한 계명대 신문에 실린 이한열 열사의 기사에는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 활동 시절 그가 그린 만화도 실려 있다.
'이한열 군 부검결과 이물질 규명 중간보고' 기록에서는 이한열 열사의 머릿속 이물질을 분석한 결과 사망 직접 사인이 최루탄 피격으로 적혀있다.
'1987년 6월 9일 5시 5분경' 기록물은 이한열 열사의 모친이 아들이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병원으로 이동하여 중환자실에서 7월 5일 임종까지 27일간에 대해 쓴 기록이다. "우리는 떨리는 걸음으로 중환자실 문으로 들어갔다. 우리 한열이가 왜 그래요. 정말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없고 코, 입, 산소 호흡기를 온몸에 착용해서 이름도 모르는 기계에 의해 호흡하고 있었으니..(중략) 한열이는 7월 5일 2시 5분에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6월 항쟁 기록으로 남은 이한열 열사 사망 이후의 '압수·수색 검증영장'에는 '압수할 물건 : 이한열 사체 1구'라 쓰여 있어 당시 공권력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압수할물건 이한열의 사체1구 수색, 검증할 장소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134번지 쎄브란스병원 영안실 신체 또는 물건 이한열의 사체 1구 위 피의사건에 관하여 압수·수색·검증한다.
지난해 5월, 이한열기념사업회는 국가기록원에 '맞춤형 복원·복제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국가기록원은 2021년 2월 중순부터 약 3개월에 걸쳐 복원을 진행하여, 제34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일에 공개하게 되었다.
국가기록원은 바래고 산성화된 종이기록물에 클리닝, 이물질 등 오염제거, 수작업 탈산, 한지로 결실부 보강을 실시하였다. 인화 사진의 경우는 이물질, 얼룩, 스크래치를 제거하고 고해상도 디지털파일로 복원하였으며 아날로그 테이프도 디지털화하였다.
이번에 복원된 기록물 중 <한열일기>, <고교생 특별수련기>, <'1987년 6월 9일 5시 5분경(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글)'>, 사진 기록물 등은 온라인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기록이다. 이 기록물은 국가기록원 누리집과 e-뮤지엄, 이한열 기념관에서 공개되어 이한열 열사를 길이 기억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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