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고립무원의 47일을 그린 영화 「남한산성」 불편한 진실과 그 이후 그들의 운명은... 상세내용(대체 텍스트)
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고립무원의 47일을 그린 영화 「남한산성」 불편한 진실과 그 이후 그들의 운명은...
명은 임진왜란(1592) 이후 급속히 쇠퇴하고, 청은 강성해져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청은 129,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왔고...조선조정은 남한산성에 포위된다.
"성을 바짝 조이면 안에서 스스로 무너질 것이옵니다." (역관 정명수가 용골대 장군에게)
청의 공세에 남한산성은 점점 어려워져 갔고...
이 시각, 성 안에 인조의 고민은 점점 깊어졌다.
"전하, 칸의 신하가 되어선 아니되옵니다. 서날쇠를 시켜 산남지방에 원군을 요청하는 전갈을 보내겠사옵니다."(김상헌)
"전하, 만백성과 군사들을 모두 죽일 순 없습니다. 청과 회친을 맺어 살길을 찾아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최명길)
얼마 후 굴욕의 삼전도에서...마침내 인조가 '살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들에 대해 무엇이라 기록했을까?
김상헌은 강직하고, 남들리 주관이 뚜렸...충절의 대명사였다
최명길은,,,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능하였다...<조선왕조실록>
후에 두 충신은 심양의 옥중에서 만나 서로를 이해했지만 당대의 지배층은 최명길을 끝내 용서하지 않은 것 같다.
청을 등에 업고 뇌물수수, 협박, 인사청탁, 사람을 죽이는 등 청의 앞잡이 정명수가 저지른 전횡은 국정농단의 원조격이었고,
백성대표 서날쇠의 실제 운명은... 실록에 따르면, 백성대표 서날쇠는 영화와는 달리 적의 포위를 꿇고 임금의 유지(諭旨,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글)를 전달하여 면천과 함께 훗날 당상관까지 지냈다.
병자호란 당시와 이때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요즘의 우리나라 정세가 비슷하다는 걱정도 있는데 당대에는 김상헌의 명분과 항전이 지지를 받았지만, 요즘의 가치 기준으로 보면, 실리와 명분, 화친과 항전의 선택지에서 그 어느 것도 국민보다 우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