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분단과 평화의 상징, 판문점 소사 상세내용(대체 텍스트)
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분단과 평화의 상징, 판문점 소사
정전협상이 한창이던 1951년
북한에서는 "경기도 장단군 널문리에서 정전회담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제안했다.
유엔군이 이를 수용해 회담장을 마련했는데, 이 천막이 판문점의 시작이다.
판문점은 정전협상국 중 하나인 중국의 편의를 위해 널문의 한자 표기인 판문과 점을 합하여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판문'의 유래는 언제부터일까?
임진왜란 때, 선조가 왜군을 피해 널빤지로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넌 것이 '판문'의 유래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같은 유래는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추강 남효은 : "여기가 판문이로구나!"
송경록(1485)에는 추강 남효은과 왕실 종친들이 개성(개성부 판문리)을 유람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태종실록(1401~1418)에서도 판문(널문)에 임금을 위한 잔치상을 준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 : 나는 재계중이니 음식을 다같이 나누어 먹어라.
실록 상 판문평을 가장 많이 방문한 임금은 태종이었다.
재계는 큰일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이다.
이후 세조는(1455~1468)도 판문을 지났는데, 때마침 내린 폭우로 마차가 구덩이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다.
이에 세조는 "의금부는 개성부 유수와 관리들을 국문하라!"라고 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정조실록(1776~1800)에서는 개국초기 장단부에 편입된 판문평을 개성부로 돌리기 위한 노력을 알 수 있다.
정창손은 1784년 '장단부에 편입된 판문평을 개성부로 되돌려주시옵소서'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정전협정 이후 2개의 주소를 갖게 된 판문평
북에서는 개성특별시 판문군 판문리, 남에서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의 주소를 가지고 있다.
역사는 돌고, 또 돈다. 그 옛날 우리는 하나였으니,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