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지옥의 격전지 장진, 오죽하면 삼수갑산이라 했으랴 상세내용(대체 텍스트)
1. 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e-기록속으로 2017년 7월호 -
지옥의 격전지 장진, 오죽하면 삼수갑산이라 했으랴
2. 한·미 정산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첫 공식일정은 장진호 전투기념비에 헌화하는 것이었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잊혀진 전투 중 하나인 장진호 전투.
文대통령은 왜 첫 공식일정으로 이 기념비를 택했을까?
3. 1950년 타임지가 "가장 참혹한 전투"로 장진호 전투를 소개했다.
장진호(長津湖,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중남·서한면에 걸쳐 있는 인공호수)
적진 깊숙이 진격했던 美 제1해병 사단이 아군 병력의 9배가 넘는 중공군의 포위를 뚫기 위해 벌인 필사적인 전투였다.
"흥남으로 이동한다"
이 전투에서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도 있었지만,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4. 장진호 일대의 살인적인 추위는 조선시대부터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놈을 당장 갑산으로 보내라"
"삼수갑산을 갈지언정 할 말은 하겠사옵니다"
조선시대 유형(流形)중 최고형은 3천리 유배에 해당하는 삼수와 갑산
워낙 산세가 험하고 혹한이어서 많은 신료들이 동사하거나 호랑이에게 잡아 먹혀 두려워하는 유배지였다.
5. 삼수갑산에서 유배생활을 한 많은 신료들 중 형제들의 유명세를 톡톡히 보았던 허봉.
(허난 설헌, 허균)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 허난설헌과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그의 친동생들이다.
요즘으로 치면 금수저였던 허봉은 21살에 친시문과를 급제하여 창원부사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관료의 길을 걸었다.
6. 선조 16년. 7월 16일
"이이는 원래 중으로 임금과 어버지를 버리는 인륜의 죄를 지었으며 근래에 있었던 여러 일 뒤에는 그의 무리가 있습니다."
"네 말이 설사 다 옮다고 해도 이제 와서야 말한 것은 불충이다. 허봉의 본직을 체차하라"
"아니됩옵니다. 부디 그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동인들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7. 한달여가 지난 8월 28일
"박근원, 송응개, 허봉 세 사람의 간특함은 내가 안다. 이들을 멀리 귀양보내는 것은 어떤가?"
"전하 아니되옵니다."
"그들은 벌을 받아 마땅하옵니다."
어찌된 일인지 서인들이 적극 구명에 나섰지만, 정철이 강력하게 처벌을 주장하여 임금은 이를 전격 수용했다.
"송응개는 회령, 박근원은 강계로 유배하고 허봉은 종성으로 보내려 했으나, 지금 적의 침입으로 어수선하다하니 갑산으로 보내라."
이때 허봉의 나이 33세로 2년여의 유배를 마치고 전국을 방랑 하던 중 1588년 9월 16일 3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8. 조선시대 3개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지는 고산 윤선도도 삼수갑산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8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수제였지만 관직에도 오르기 전인 1616년에 첫 유배를 갔다.
광해군 8년 12월 21일
"윤선도는 외딴섬에 유배하고 그의 아비 윤유기는 관직을 삭탈하여 시골로 보내라."
상소 : 예조판서 이이첨이 벼슬아치들을 끌어 모으고 과거로써 유생들을 거두어 들여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세상이 모두 그에게 쏠려들고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이 상소를 올립니다. -진사 윤선도 올림-
그나마 윤유기가 서인이어서 같은 당여인 이이첨이 선처를 부탁하여 이 정도에 그쳤다.
9. 이후 유배와 은거, 복권을 거듭하던 윤선도는 42세이던 1628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대군들의 스승이 되었다.
훗날 효정이 된 봉림대군은 재위 3년에 보길에도 있던 스승을 불러올려 예조참의에 제수했고, 71세에는 동부승지를 주었으나, 그의 관운은 여기까지였다.
현종 즉위 1년 7월 7일
"안산(상왕의 장례)를 정하지 못해 성상의 마음이 아프시고 신료들도 분주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윤선도는 병의 핑계로 산에도 오지 않고, 불경죄를 저질렀으니, 당장 추포하여 국문해야 하옵니다."
이를 계기고 촉발된 남인과 서인의 지루한 당쟁은 다음해 4월 30일 윤선도를 삼수에 유배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0. 송준길의 건의를 보면, 삼수가 얼마나 험한 유배지인지 엿볼 수 있다.
"성상께서 일단 목숨만은 살려 주셨지만, 삼수는 죽게 마련인 지역입니다. 게다가 그의 나이 80이 다 되어갑니다. 그를 꼭 그곳에서 죽게 해야겠습니까."
"사형에 처할 것을 감해 주었더니...삼수보다 더 나쁜 곳이 없다하니, 그 자리서 위리안치하라."
위리안치(가시 울타리를 높이 막아 외부출입을 금지시키는 가택연금)
"벌을 강하게 주시옵소서"
남인들은 절대 열세였음에도 구명운동을 거듭해 1665년 고향 근처인 전남 광양으로, 2년 후에는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게 했다.
11. 유배제도가 만들어진 이후 수 없이 많은 신료들이 자신의 철학과 믿음, 또는 당쟁이나 모함으로 삼수갑산을 다녀갔다.
할 말은 하고, 상대의 주장은 귀담아 들어줄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이다. 쓴 소리를 했다고 삼수갑산을 가는 일은 조선시대나 있었던 옛 이야기고 이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성숙한 사회가 되었음을 믿는다.